백승호의 인생 이야기
울산 조선소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칭찬을 숫자로만 했다. 아홉 살 승호가 아버지가 설계에 참여한 배의 진수식에 처음 갔을 때, 승호는 뱃고동 소리에 펄쩍펄쩍 뛰었지만 아버지는 클립보드에 뭔가를 적느라 한 번도 아들 쪽을 보지 않았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들은 말은 '배수량 십오만 톤이다' 한마디였고, 승호는 그 숫자가 자기를 향한 말이었는지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
결정적 장면들
- 1999진수식
거대한 선체가 물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승호는 무언가가 '세다'는 걸 몸으로 처음 느꼈다. 설명 없이도 압도되는 감각이었다. 그날 밤 공책에 배를 그리고 옆에 '15만'이라고 크게 써 넣었다.
- 2009산업디자인 1학년
서울과기대 첫 품평회에서 승호는 설명 문단만 여섯 줄인 패널을 냈다가 '읽기 전에 지나간다'는 혹평을 받았다. 다음 과제에서 그는 문장을 전부 지우고 숫자 하나만 크게 남겼다. 그 패널 앞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멈춰 섰다.
- 2015철물점의 2초
공구·모터 브랜드 디자이너 시절, 성수동 철물점에 하루 종일 앉아 손님들을 관찰했다. 현장 기사들은 진열대 앞에서 평균 2초 만에 제품을 집었고, 그들이 본 건 박스 정면의 와트 수와 토크 수치뿐이었다. 승호는 그날 '짧은 게 무성의한 게 아니라, 바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걸 배웠다.
- 2020결승선 그래픽
스포츠 브랜드로 옮겨 러닝화 캠페인을 맡으며 속도감을 그래픽으로 만드는 법을 익혔다. 기울어진 서체, 잘린 숫자, 오렌지 한 줄. 촬영장에서 선수가 '이거 보니까 뛰고 싶네요'라고 했을 때, 그는 디자인이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 2026블랙 앤 오렌지
소프틀리 포스젯에 합류한 첫 주, 청소기 흡입력 수치를 박스 정면 절반 크기로 키운 시안을 올렸다. '너무 세지 않아요?'라는 반응에 그는 '세 보이려고 만든 제품이잖아요'라고 웃었다. 그 시안은 거의 그대로 통과됐다.
2015년 철물점에서 한 기사가 박스를 집어 들며 '이거 숫자 보니까 됐네' 하고 계산대로 가는 걸 봤을 때, 승호는 아버지의 '15만 톤'이 무뚝뚝함이 아니라 그 세계의 최대치 칭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했다. 말 대신 숫자로 전하는 힘, 그걸 제대로 쓰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Why → How → What
- WHY
- 성능이 좋은 제품은 보는 순간 세다고 느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수식에서 배가 물에 들어가던 그 압도감은 설명이 필요 없었어요. 포스젯 제품도 고객이 박스를 보는 2초 안에 그런 확신을 줘야 합니다.
- HOW
- 숫자는 크게, 문장은 짧게, 색은 블랙과 오렌지로. 시안을 만들면 휴대폰을 팔 길이만큼 떨어뜨려 놓고 2초만 보고, 그 안에 핵심 수치가 읽히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업소용 B2B 자료도 똑같이, 사장님이 표 한 줄만 보고 결정할 수 있게 만듭니다.
- WHAT
- 포스젯 블랙·오렌지 아이덴티티와 성능 수치 중심 패키지·광고 레이아웃을 관리합니다. 업소용 라인 B2B 자료도 같은 원칙으로 짧고 굵게 정리합니다.
은퇴한 아버지와 이제는 주말마다 해안도로를 함께 달리지만, 헬멧을 벗고 나면 여전히 '연비 좋네' 같은 말만 오간다. 숫자 말고 문장으로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해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연표 한눈에 보기
- 1990울산 조선소 엔지니어 아버지 아래서 태어남
- 2009서울과기대 산업디자인과 입학
- 2015공구·모터 브랜드 디자이너
- 2020스포츠 브랜드 그래픽 디자이너
- 2026소프틀리 포스젯 BX 디자이너 합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