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래의 인생 이야기
부평 시장 입구 문구점은 3월 신학기와 12월 연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나래는 그 계절마다 계산대 아래 박스 더미 사이에서 컸다. 엄마는 손님 선물은 리본까지 각 잡아 예쁘게 포장해 줬지만, 나래의 열 살 생일 선물은 가게 뒤에서 꺼낸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왔다. 나래는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웃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포장은 남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정적 장면들
- 2005계산대 아래 왕국
여덟 살 나래는 문구점 계산대 밑에 납품 박스로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다. 손님들 발만 보이는 그곳에서, 봉투 규격이 적힌 납품서를 그림책처럼 넘겨 봤다. 서류 봉투가 왜 '대봉'인지 나래는 구구단보다 먼저 외웠다.
- 2007검은 비닐봉지
열 살 생일, 엄마는 연말 대목 손님 줄을 끊지 못하고 가게 뒤에서 꺼낸 비닐봉지에 선물을 담아 건넸다. 안에 든 필통은 나래가 갖고 싶던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나래는 그 봉지를 오래 기억했다. 다음 날 나래는 남은 크라프트지로 자기 필통을 직접 다시 포장했다.
- 2016쇼핑백을 낸 신입생
서울여대 산업디자인과 첫 과제로 다들 의자나 조명을 디자인할 때, 나래는 쇼핑백을 만들었다. '봉투가 무슨 디자인이냐'는 말에도 그녀는 손잡이 각도와 접는 선을 열두 가지로 바꿔 보며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 과제가 학기 최고점이었다.
- 2020빵집 사장님의 눈물
포장재 회사에서 동네 작은 빵집 봉투를 새로 디자인해 준 날, 사장님이 박스를 열어 보고 '이제 우리 가게가 진짜 가게 같네요' 하며 눈가를 훔쳤다. 나래는 그 표정이 장사에 지쳐 늘 바빴던 엄마 얼굴과 겹쳐 보였다. 포장이 물건만이 아니라 가게 주인의 자존감을 감싼다는 걸 알았다.
- 2023손바닥 샘플 키트
굿즈·패키지 스튜디오를 함께 운영하며 소상공인용 샘플 키트를 처음 만들었다. 사장님들은 바빠서 카탈로그를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규격별 실물을 손바닥 크기로 잘라 넣었다. 재주문율이 두 배가 됐다.
2020년 빵집 사장님이 우는 걸 본 날, 나래는 엄마가 왜 자기 선물만 비닐봉지에 담았는지 이해했다. 사장님들은 남을 위해 포장하느라 정작 자기 몫을 챙길 시간이 없다. 그 바쁜 사람들이 1분 안에 고르고 주문할 수 있게 돕는 것, 그게 나래가 엄마에게 늦게나마 건네는 선물이 됐다.
그래서, Why → How → What
- WHY
- 포장도 브랜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걸 고르는 사장님들은 늘 시간이 없어요. 문구점 계산대 밑에서 자라면서 장사하는 사람의 하루가 얼마나 빠듯한지 봤기 때문에, 고르기 쉬운 것이 가장 큰 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 HOW
- 규격과 가격이 먼저 보이게, 그다음에 예쁘게. 상품 이미지 옆에는 늘 손이나 A4 용지를 함께 놓아 실제 크기를 바로 가늠하게 하고, 규격표는 사장님이 휴대폰 한 화면에 볼 수 있을 때까지 줄입니다. 밝은 색은 마지막에, 정보가 다 자리 잡은 뒤에 얹습니다.
- WHAT
- 봉투월드 봉투·포장재 상품 이미지와 규격표, 샘플 키트·카탈로그를 디자인합니다. B2B 주문 페이지를 정리해 사장님들이 비교하고 바로 주문하도록 만듭니다.
부평 문구점은 몇 해 전 문을 닫았고, 나래는 결국 부모님 가게 봉투를 한 번도 디자인해 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크라프트 봉투 시안을 만들 때면 그 가게 간판 글씨체를 무심코 떠올린다.
연표 한눈에 보기
- 1997인천 부평에서 문구점 하는 집 딸로 태어남
- 2016서울여대 산업디자인과 입학
- 2020포장재 회사 디자이너 — 박스와 봉투에 빠짐
- 2023굿즈·패키지 스튜디오 공동 운영
- 2026소프틀리 봉투월드 BX 디자이너 합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