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담의 인생 이야기
광주 집 차고에는 건축가 아버지가 ‘이번 공모전 끝나면 마저 만들자’던 원목 식탁이 다리 두 개만 달린 채 방수포에 덮여 있었다. 아버지는 공모전 시즌이면 몇 달씩 사무실에서 살다가, 끝나면 갑자기 캠핑이니 여행이니 몰아서 가족 곁에 머물렀다. 소담의 어린 시절은 폭풍과 무풍 사이를 오갔고, 다음 주가 어떨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비어 있던 건 예측할 수 있는 하루, 그리고 끝까지 완성되는 무언가였다.
결정적 장면들
- 1999방수포 아래의 식탁
여덟 살 소담은 차고에 들어가 방수포를 들추고 미완성 식탁 다리의 길이를 줄자로 쟀다. 설계도 없이도 나머지 두 다리를 똑같이 만들면 될 것 같았지만, 톱을 쓸 수 없는 나이였다. 그 식탁은 이후 팔 년 동안 같은 자리에 덮여 있었다.
- 2007열일곱 권의 1월 일기장
고등학생 소담은 해마다 1월 1일 새 일기장을 샀고, 그 일기장들은 대부분 1월 셋째 주에서 멈췄다. 책장에 꽂힌 열일곱 권의 얇은 시작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결론은 틀렸지만, 그걸 알기까지 팔 년이 걸렸다.
- 2012그리드라는 약속
서울대 디자인학부 3학년, 도서관에서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그리드 교본을 펼쳤다가 그대로 마감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 칸을 먼저 정해두면 내용이 바뀌어도 페이지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원리가, 그녀에겐 디자인 이론이 아니라 위로처럼 읽혔다. 그날 이후 노트 첫 장에는 늘 손으로 그은 그리드가 있다.
- 2015버튼 400개를 12개로
IT 회사 디자인 시스템 팀에 들어가 제품 곳곳에 흩어진 버튼 변형을 세어보니 사백 개가 넘었다. 석 달 동안 토큰과 규칙으로 열두 개까지 줄였고, 그 뒤로 새 화면이 나와도 아무도 버튼을 새로 그리지 않았다. 의지로 지키던 일관성이 구조 하나로 저절로 지켜지는 걸 처음 눈으로 봤다.
- 2024도면으로 끝낸 식탁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차고의 그 식탁을 꺼냈다. 소담이 치수와 결합 방식을 도면으로 정리해 갔고, 둘은 주말 네 번 만에 나머지 다리와 상판을 마쳤다. 아버지는 ‘네가 도면을 그려 오니까 끝나네’라며 웃었다.
버튼 사백 개를 열두 개로 줄인 뒤, 소담은 열일곱 권의 일기장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없던 문제였다는 걸 알았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결심해야 하는 일은 누구라도 멈춘다. 그때부터 그녀는 꾸준함을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고, 꾸준할 수밖에 없는 틀을 먼저 만든다.
그래서, Why → How → What
- WHY
- 꾸준함은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브랜드도 사람처럼 바쁜 시즌엔 흔들리기 마련이고, 그때 버텨주는 건 담당자의 정신력이 아니라 미리 정해둔 그리드와 규칙입니다. 스테디랩스가 누가 만들어도 스테디랩스처럼 보이길 바랍니다.
- HOW
- 그리드와 타이포그래피로, 한 번 만들 때 열 번 쓰이게 합니다. 새 포맷을 요청받으면 그 콘텐츠가 앞으로 몇 번 반복될지부터 묻고, 반복된다면 템플릿과 토큰으로 바꿉니다. 예외가 세 번 나오면 그건 예외가 아니라 규칙의 빈칸으로 보고 시스템에 추가합니다.
- WHAT
- 스테디랩스의 브랜드 그리드와 타이포 시스템, 디자인 토큰을 관리합니다. 반복되는 콘텐츠는 템플릿 포맷으로 만들어 팀 누구나 같은 품질로 바로 쓰게 합니다.
일과 생활은 거의 다 시스템으로 만들었지만, 사람 사이의 일은 아직 템플릿이 안 된다. 아버지에게 거는 전화는 여전히 ‘무슨 일 있을 때’만 울린다.
연표 한눈에 보기
- 1991광주에서 건축가 아버지 아래 태어남
- 2010서울대 디자인학부 입학
- 2015IT 회사 디자인 시스템 팀
- 2021타이포그래피 스튜디오 공동 설립
- 2026소프틀리 스테디랩스 BX 디자이너 합류

